소버린 AI(Sovereign AI)를 향한 여정의 첫 단추는 '우리만의 모델'을 갖는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한국어와 우리의 제도, 문화를 이해하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독자 플랫폼 모델(독파모)은 결국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최근 Fable 사용 제한 사태는 알려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진정한 소버린 AI란 모델의 주권을 갖는 것이자, 동시에 연산의 주권을 갖는 것이다.
과거의 산업화가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올라가는 패스트팔로워(Fast Follower)의 길이었다면, 지금의 AI시대는 대한민국이 룰메이커(Rule Maker)로써 TOP3의 선진국으로 갈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의 시간이다.
그러나 독파모 모델은 AI산업정책의 최종 목적지가 아닌 출발지일 뿐이다. 진정한 AI 주권은 그 모델이 행정, 교육, 의료, 제조, 금융, 국방 등 실제 산업 현장에서 서비스로 검증되고, 이를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계산 인프라가 따라올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모델을 만들어 쓸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면, 추론 인프라까지도 통제할 능력을 가지려고 목표하는 것이 맞다.
각자도생의 위험과 지휘자의 조율
문제는 현재 우리의 AI 생태계를 구성하는 주체들이 저절로 완벽한 조화를 이룰 것으로 기대하기는 상당히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다. 아시다시피,
-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빠른 실험과 빛의 속도로 시장을 확장하길 원할 수밖에 없다.
- 반도체 스타트업: 긴 개발 주기와 막대한 검증 비용을 생각했을 때, 신뢰할 수 있는 제조 파트너와 초기 시장 확보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 대기업: 수백만 직원가족들의 생계와 국가경제에 대한 책임감으로 안정성과 규모의 경제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 정부: 국가 경쟁력 강화와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거시적 목표를 동시에 바라볼 수밖에 없는 유일한 이해관계자다.
이러니 각자의 논리는 백번 옳을 수밖에 없는데, 너도 옳고 나도 옳으니 자연스럽게 시간을 갖고 찬찬히 해보자는 말은 너무 느긋할 수밖에 없는 요즘이 아닌가. 소프트웨어는 반도체 없이는 계산 자원을 갖기 어렵고, 반도체는 소프트웨어 생태계 없이는 시장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뜨거운 주식 열풍 덕분인지 이제 전 국민의 상식으로 봐도 무난하다. 그러므로 이 명백한 간극을 메우는 일이야말로 AI 시대 산업정책의 핵심이다.
과거 한국 산업화의 출발을 돌이켜보자. 삼성과 현대 같은 기업의 성장은 기업가 정신과 함께 금융, 수출, 인프라, 산업정책이 맞물린 결과였다. 정부가 전략 산업을 정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대기업의 성장을 밀어 올렸던 고도성장기의 방식은 지금의 K-pop 시대의 원천 경제력이다.
물론 오늘의 방식은 달라야 하겠지만 — 즉, 소수 대기업만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 기업이 서로 연결되고 경쟁하며 성장할 수 있는 환경조성으로 가야하지만 — 어쨌든 그때 그 산업화 시대에 걸맞게 거대한 비전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임은 동일하다. 그리고 기회의 시간은 길지 않다.
보조금 행정에서 '연결의 설계'로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보조금 행정이 아니다. 소프트웨어와 반도체, 스타트업과 대기업, 연구개발과 양산, 수도권과 지역 산업을 중재하고 조율할 수 있는 정부의 리더십이다. AI 시대의 정부 수장은 지원자가 아니라 조정자(Coordinator)여야 한다.
한국형 AI 반도체의 첫 전장은 '초거대 학습'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추론 인프라'다. OpenAI가 브로드컴(Broadcom)과 손잡고 자체 추론칩 개발에 나선 흐름은, 모델 기업이 커질수록 추론 비용과 인프라 통제력을 얼마나 뼈아프게 보는지 잘 보여준다.
국내 AI 반도체 기업을 주목하자는 말은 검증 없이 무조건 보호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국산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해서도 안 되고, 초기라는 이유로 시장에 방치해서도 안 된다. 진짜 서비스와 진짜 부하(Load)가 걸리는 현장에서 성능, 비용, 전력, 안정성을 혹독하게 검증받을 기회를 더 빨리 만들어주어야 한다. 애국심이 아니라 철저한 성과 기준 위에 서야 한다는 뜻이다.
조정자형 리더십이 만들어야 할 중립적 장
정부가 반도체·AI·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 구상을 내놓고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지금, 진짜 중요한 것은 돈의 규모보다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이다. 이 풀스택 생태계는 대기업 중심이 아니라, 스타트업이 혼자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제조·메모리·데이터센터·공공 시장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부가 당장 실행해주어야 할 역할은 명확하다.
- 공동 실증 환경 조성: 스타트업과 대기업이 함께 실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장 만들기
- 공공 조달의 테스트베드화: 초기 AI 서비스와 반도체를 검증할 수 있는 공공 시장 제공
- 객관적 검증 기준 운영: 성능·보안·비용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검증 기준 마련
- 인프라 병목 해소: 데이터센터 부지, 전력 수급, 규제 완화 등 고질적 문제 해결
이미 계획하에 진행되고 있는 일들이겠지만, KPI는 공급과 체크박스가 아니라, 연결의 효과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적어보았다.
소버린 AI란 말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시는 분들이 많다는 점, 알고 있다. 그러나 소버린AI가 남의 일도 아니다. 올바른 소버린 AI는 결코 폐쇄적인 국산화 운동이 아니다. 글로벌 최고 기술을 유연하게 활용하되, 국가와 기업이 핵심 선택권을 잃지 않도록 대체 가능성과 협상력을 확보하는 고도의 전략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는 국가 단위가 아니라 통제권을 잃지 않고 싶은 더 작은 경제 단위들(예: 지방정부, 대기업, 어쩌면 개인 등)에게도 생각할 거리가 된다.
정리하면, 스타트업이 대기업의 제조·메모리·데이터센터 역량을 타고 세계 시장으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산업 연결망. 이 풀스택 생태계를 완벽하게 설계해내는 국가만이, 다가올 AI 통제권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다. 이를 안다고 해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나라는 현재 몇 없다. 새로운 AI수석과 그 외 국가지도자 그룹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